친구나 애인이 명의를 빌려달라고 할 때
가까운 사람이 명의를 빌려달라고 하면 거절하기가 참 어려워요. 휴대폰, 통장, 대출, 보증마다 실제로 무슨 일이 생기는지 알면 거절이 쉬워져요. 사이를 덜 다치게 거절하는 말도요.

안 된다고 하는 게 맞아요. 명의를 빌려주면 요금도, 빚도, 사고가 났을 때의 책임도 서류에는 전부 내 이름으로 남아요. 상대가 약속을 지키는 동안은 아무 일이 없지만, 연락이 끊기는 날부터는 내가 갚아야 해요.
휴대폰을 개통해 달라고 할 때
제일 흔한 부탁이에요. "미납이 있어서 내 이름으로는 개통이 안 된대. 요금은 내가 꼬박꼬박 낼게." 듣기에는 작은 부탁 같죠.
그런데 그 휴대폰의 요금과 기기 할부금, 소액결제까지 청구서는 전부 내 앞으로 와요. 상대가 요금을 밀리면 독촉 전화를 받는 사람도, 연체 기록이 남는 사람도 나예요. 기기 할부는 대개 이 년쯤 이어져서 잠깐만 쓰겠다는 말부터가 성립하기 어려워요.
요금보다 걱정되는 건 그 번호가 어디에 쓰이는지 내가 모른다는 점이에요. 중고 거래 사기나 스팸에 쓰이면 조사 연락은 명의자인 나에게 먼저 와요. 그때 "저는 빌려주기만 했어요"라는 말로 바로 끝나지 않아요. 내 이름으로 개통한 번호라서 누구에게 왜 넘겼는지를 내가 설명해야 해요.
"폰 하나 개통해서 넘기면 수고비를 준대" 하는 제안도 같은 얘기예요. 친구가 같이 하자고 해도 마찬가지고요. 받은 돈보다 훨씬 큰 기기값과 요금이 내 이름으로 남아요.
통장과 계좌, 대출과 보증
통장이나 체크카드, 비밀번호를 남에게 넘기는 건 그 자체로 문제가 될 수 있어요. 아는 사람이니 괜찮겠지 싶어도요. "네 계좌로 돈이 들어오면 내가 말하는 데로 보내 주기만 해"라는 부탁도 같아요. 그 돈이 누군가 사기를 당해 보낸 돈이라면 내 계좌가 묶이고 내가 조사를 받을 수 있어요.
대출은 더 단순해요. 내 이름으로 받은 돈은 누가 썼든 내 빚이에요. 상대가 매달 갚아 주기로 했어도 금융사는 그 약속을 몰라요. 연체가 생기면 그 기록은 내 것이고, 나중에 내가 전세 대출을 받거나 카드를 만들 때 걸림돌이 돼요.
보증도 "서류에 이름만 올리는 거야"라고들 하는데, 그 이름이 하는 일이 바로 대신 갚는 거예요. 상대가 못 갚게 되는 순간 청구는 나에게 와요. 차나 사업자 명의도 구조가 같아요. 세금과 과태료 고지서가 내 앞으로 나오고, 사고가 나거나 가게가 빚을 지면 서류에 적힌 나에게 먼저 연락이 와요.
부탁에 따라붙는 말들
"잠깐이면 돼", "딱 석 달만", "너한테 피해 안 가게 할게", "우리 사이에 이것도 못 해 줘". 대개 이런 말이 같이 와요. 속이려는 게 아니라 정말 그럴 생각으로 하는 말인 경우가 많아요. 그래도 약속을 지키게 해 주는 건 마음이 아니라 형편이에요. 일자리를 잃거나, 다른 빚이 터지거나, 둘 사이가 틀어지면 착한 사람도 못 내요.
돈을 달라는 게 아니라서 가볍게 들린다는 것도 거절을 어렵게 해요. 오십만 원을 빌려 달라고 하면 망설일 사람도 이름만 빌려 달라는 말에는 선뜻 그러자고 해요. 그런데 돈은 빌려준 만큼만 잃지만 명의는 얼마가 될지 정해져 있지 않아요. 액수를 모르는 돈을 빌려주는 것과 같아요.
자기 이름으로 안 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해요. 이미 밀린 요금이 있거나, 빚이 한도까지 찼거나, 드러나면 곤란한 사정이 있는 거예요. 내 이름을 빌려주면 그 이유까지 내가 떠안게 돼요. 통신사나 금융사가 안 된다고 본 위험을 내가 대신 지는 셈이니까요.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 부탁한다면
사귄 지 몇 주나 몇 달밖에 안 된 사람이 개통이나 계좌, 대출을 부탁한다면 사기를 의심해야 해요. 통장이 압류됐다, 해외에 있어서 본인 인증이 안 된다, 가족이 아프다 같은 급한 사연이 붙곤 해요. 얼굴을 본 적 없이 온라인으로만 알던 사이라면 더 그렇고요. 로맨스 스캠에서 자주 쓰는 말과 겹치는 게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덜 다치게 거절하는 말
사람 말고 내 원칙을 이유로 대면 덜 상해요. "나는 명의는 가족한테도 안 빌려줘. 너라서 그러는 게 아니야." 사정을 길게 설명하기 시작하면 하나씩 반박이 돌아오니까 이 문장만 되풀이하는 게 나아요.
"나 못 믿어?" 하고 물으면 이렇게 답하세요. "믿고 안 믿고가 아니라, 일이 틀어지면 서류에는 내 이름만 남아서 그래." 믿음의 문제로 끌려가면 거절하는 쪽이 나쁜 사람이 돼요. 얘기를 서류 쪽으로 돌려놓으세요.
얼굴을 보고는 도저히 거절을 못 하겠다면 그 자리에서 답하지 않아도 돼요. "생각해 보고 내일 말해 줄게" 하고 헤어진 뒤 메시지로 거절하세요. 같이 대리점까지 간 상황이어도 서류에 서명하기 전이면 늦지 않았어요.
돕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다른 걸 내놓으면 돼요. "명의는 안 되고, 급한 거면 내가 이만큼은 보탤 수 있어." 여기서 말하는 금액은 못 돌려받아도 괜찮은 만큼이어야 해요. 통신사나 은행에 같이 가서 본인 이름으로 되는 방법이 있는지 알아봐 주겠다고 해도 좋아요. 돈을 빌려 달라는 부탁을 거절하는 요령도 여기에 그대로 쓸 수 있어요.
거절하고 나면 며칠은 서먹할 거예요. 그 정도는 지나가요. 명의를 안 빌려줬다는 이유로 끝나는 사이였다면, 빌려준 뒤에 문제가 생겼을 때 곁에 남아 있었을 가능성도 낮아요.
이미 빌려줬으면 지금 할 일
돕고 싶어서 한 일이니 스스로를 탓하는 데 시간을 쓰지 마세요. 지금부터 줄일 수 있는 게 많아요. 상대와 아직 연락이 된다면 날짜부터 정하세요. "다음 주 금요일까지 네 이름으로 옮겨 줘. 그날 통신사에 같이 가자." 언젠가 가져가겠다는 말은 받지 않아요.
휴대폰이라면 개통한 통신사에 연락해 미납 요금과 남은 기기값이 얼마인지부터 확인하세요. 내 이름으로 된 회선이 더 있는지도 같이 물어보고요. 소액결제는 바로 막고, 해지하거나 상대 이름으로 바꿀 수 있는지 알아보세요. 해지하면 남은 기기값을 내가 내야 할 수 있지만 매달 쌓이는 것보다는 나아요.
통장이나 카드를 넘겼다면 은행과 카드사에 바로 알려서 거래를 멈추고 다시 발급받으세요. 거래 내역에 모르는 돈이 들어오고 나간 게 있으면 그 돈에는 손대지 말고 은행에 그대로 말해야 해요. 대출이나 보증은 남은 금액과 연체 여부를 금융사에 직접 확인하고, 상대에게 언제까지 어떻게 갚을지를 메시지로 받아 두세요.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겠으면 금융감독원 1332에 전화해 상담을 받으세요. 내 명의가 사기에 쓰인 것 같다면 미루지 말고 112나 가까운 경찰서에 알려야 해요. 부탁받을 때 주고받은 대화는 전부 그대로 두세요. "요금은 내가 낼게"라고 한 메시지 한 줄이 나중에 내 사정을 설명해 줘요.
거절해서 서먹해진 사이는 시간이 지나면 풀리기도 해요. 내 이름으로 남은 빚과 기록은 그렇게 풀리지 않아요.




